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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고 민병수 변호사의 미완성 프로젝트

고 민병수 변호사에 대한 첫 기억은 묘지가 시작이다. LA한인타운 인근 워싱턴 불러바드에 있는 ‘안젤루스 로즈데일 묘지’가 기억의 장소다.   민 변호사는 매주 토요일이면 몇몇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한인 이민 선조들이 묻혀있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미주한인재단이라는 이름의 비영리재단을 세우고 ‘미주 한인의 날’ 제정에 성공한 민 변호사가 생각해 낸 또 다른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민 변호사와 함께 한 일행들은 그가 늘 ‘친구’라고 부르던 한인 1.5세와 2세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LA통합교육구에서 커뮤니티 담당관으로 일하던 홍연아씨와 알렉스·마가렛 차 변호사 부부, 베렌도중학교 수학교사였던 존 공, 윌튼플레이스 초등학교 교사였던 린지 이, 그 외에 애나 정, 안드레아 나, 토니 등이다.     토요일 아침 눈 뜨자마자 달려오는 ‘친구’들의 빈 속을 위해 민 변호사는 늘 삶은 달걀과 구운 고구마 등을 챙겨왔다. 그리고 정오가 될 때까지 함께 쭈그려 앉아 묘비명을 확인하고 한인 이름을 찾으면 위치를 기록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들은 그렇게 일제 강점기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동지회의 이순기씨와 김영옥 대령 부모의 묘지 등을 찾아냈다. 이순기씨는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인 새미 리 박사와 한인 첫 여성 교육자인 메리 손 여사의 부친이기도 하다.  또 그동안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던 한인 독립유공자들의 묘비를 발견해 그들의 유해가 한국 현충원으로 옮겨지는 길을 마련했다.   민 변호사가 로즈데일 묘지에 그렇게 공을 들인 건 그곳에 묻혀 있는 한인 선조들 때문이다. 민 변호사는 늘 이민 초창기 인종차별로 인해 죽어서도 갈 곳이 없던 한인들을 유일하게 받아주던 로즈데일에 있는 한인 선조들을 후손들이 기억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하곤 했다.   대한인국민회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곳에는 280여 명의 한인 선조들이 잠들어있다. 앞에 언급된 인물들 외에 재미한인사약 상·중의 저자 노재연, 강익두, 김관유, 김중수 목사, 마춘봉, 박리근, 윌리 송, 멕시코에 이민을 갔다가 미국으로 온 후 100세 장수를 누린 선우 로사, 임준기 목사 등이 있다.   민 변호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민 선조들의 이야기를 가능한 자세히 남기려 애를 썼다. 그는 종종 “이야기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한인 선조들의 이야기가 곧 한인 이민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20년을 맞은 한인 이민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면서 곧 한인이 대통령이 되는 시대를 맞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걸 누가 상상했겠는가. 1세들은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됐다. 한인 후손도 반드시 대통령이 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보지 못하지만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인 선조들이 묻힌 위치를 기록한 묘지 지도를 남기는 이 프로젝트는 간단한 것 같았지만 끝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 넓은 곳에 묻혀 있는 한인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주말마다 묘지에 가서 말 그대로 노동에 가까운 일을 해야 하는 탓에 1세들의 참여는 미미했다. 그런데도 민 변호사는 암 수술을 받기 전까지 꾸준히 혼자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민 변호사가 고인이 되면서 이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지난 1일 별세한 민 변호사의 추모예배가 남가주새누리교회에서 지난 10일 진행됐다. 유족과 친지를 제외하면 한인 조문객은 100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항상 앞장서 봉사하고 목소리를 높였던 그의 업적과 공로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큰 이별이었다.     그의 희망과 비전이 실현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민 변호사는 떠났지만 그의 바람대로 한인 사회가 우리의 역사를 기억 속에서 잊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장연화 / 사회부 부국장중앙칼럼 프로젝트 민병수 한인 이민사 민병수 변호사 변호사 부부

2023-06-13

한인사회 버팀목 떠났다

한인사회의 버팀목이 떠났다. 지난 1일 별세한 고 민병수 변호사의 추모 예배가 지난 10일 오전 10시 LA의 남가주새누리교회에서 엄수됐다.   이날 추모예배는 김영완 LA 총영사를 비롯해 강석희 연방조달청 북서부지부 총괄행정관, 박병철 에베레스트트레이딩사 회장, 태미정 류, 앤 박 판사,  류영욱 한인커뮤니티변호사협회장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고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을 시작으로 ‘주기도문’ 피아노 연주, 조가 등으로 진행된 추모예배는 지난 60여년간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애쓰며 일했던 활동과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선행 등을 알리는 시간으로 꽉 채워졌다.   예배를 집전한 제임스 이 목사는 “민병수 변호사는 내가 젊은 시절 저지른 실수로 법률 도움을 받아야 했을 때 옆에서 도움을 주고 새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라며 “이렇게 고인의 떠나는 길을 함께 할 수 있게 돼 영광”이라고 자신의 간증을 들려줬다.   김영완 총영사는 추모사에서 “민병수 변호사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나침반이었다. 살아계시는 동안 한인들의 권익 보호와 정치력 성장을 위해 앞장서셨던 시민 운동가이자 우리 모두의 변호사였다”며 애도했다.   전 한미민주당협회장이자 변호사인 해나 김씨는 조사에서 “고인은 한인 커뮤니티의 미래를 도와야 한다며 누구보다 2세에게 더 많이 관심을 갖고 시간을 할애하셨던 분”이라며 “무엇보다 4·29 LA폭동이 발생했을 때는 몇몇 커뮤니티 변호사들과 함께 사재를 털어 미주한인법률재단을 설립하고 폭동 피해자를 위해 무료 변론을 하셨을 만큼 커뮤니티를 사랑하시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전했다.   강석희 총괄행정관은 “민병수 변호사는 미국에 도착한 이후 오늘까지 한인사회를 위해서 그의 모든 정열을 바치시며 평생을 헌신하신 진정한 이 시대의 어른이자 선구자”라고 고인과의 이별에 안타까워했다.   이어 “지난 25년간 나의 정치 역정에도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신 분으로 지극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면서 “2004년 처음 어바인 시의원에 출마했을 때도 장거리를 운전하고 오셔서 함께 홍보물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유세를 도와주셨다. 그분의 진정성을 믿고 유권자들이 투표해준 덕분에 어바인의 첫 아시안 시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가주의 첫 한인 여성 판사인 태미 정 류 판사는 “민병수 변호사는 언제 어디서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마다치 않았다. 그분의 추천과 지지로 많은 정치인과 법조인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조객들 "봉사 몸소 보여준 분"     그레이스 유 변호사는 "그분은 봉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시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걸 가르쳐주신 분이다.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후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아버지인 고 민희식 초대 LA 총영사를 따라 가족과 함께 LA에 왔다. 1975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한인으로는 세 번째, 남가주에서는 두 번째 변호사로 합격한 후 48년간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한인 커뮤니티의 대들보이자 맏형 역할을 마다치 않던 그는 1983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를 설립했으며, 현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의 전신인 한인청소년센터(KYC) 이사(1975~83년)로 있으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LA카운티 산하 법률위원회 첫 한인 커미셔너(1983~87년)이기도 했으며, LA폭동 이후에는 한미법률재단(KALAF) 회장을 맡아 폭동 피해 업주들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2004년 미주 한인의 날 제정과 한인타운 내 찰스 김 초등학교(2006년), 김영옥중학교(2009년), 새미리초등학교(2013년) 이름 명명에 앞장섰다. 또 세계한인교육자총연합회(IKEN) 초대 회장( 2010년), 애국동지회 고문(2013년)을 역임하며 한인 사회에 공헌했다.     한편 고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됐으며 장지가 결정되는 대로 묻힐 예정이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민병수 변호사 민병수 변호사 커뮤니티 변호사들 이날 추모예배

2023-06-11

[삶과 추억] 고 민병수 변호사…'한인커뮤니티 사랑' 기여와 봉사로 실천

남가주 한인 커뮤니티의 대들보이자 맏형이 떠났다.     1일 오전 향년 90세로 타계한 민병수 변호사는 최근 폐렴과 염증 등으로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투병생활을 해왔지만 지난주부터 병세가 악화됐고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유족 측은 “평소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했다”고 밝혔다.     민 변호사는 초대 교통부 장관이며 LA 1대 총영사였던 민희식(1895~1980년) 선생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3 때인 1948년 LA에 도착한 그는 라번 대학을 졸업해 교사로 일하면서 글렌데일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975년 변호사가 됐다.   한미변호사협회(KABA)를 창설하고 회장을 역임한 그는 지미 카터 대통령 때 민주당 대통령 자문위원을 지내는 동안 한인 커뮤니티의 각종 현안을 백악관에 직접 건의했다.     LA폭동이 발생한 1992년 말 민 변호사는 KABA 산하 한인법률권익재단을 통해 피해를 입은 업주들을 대리해 시 정부에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2년 만에 마무리된 이 소송은 LA시가 피해 업소당 2만 달러의 손해배상 비용을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는데 당시 소송에 끝까지 남아 있던 한인 업주 10명이 배상금을 받아냈다. 이러한 결과는 민 변호사와 한인법률권익재단의 노력과 업주들의 지지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LA미주한인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2003년에는 LA시와 카운티, 캘리포니아주와 연방 정부가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로 제정, 선포하는 데 기여했다. 그가 직접 작성한 미주 한인의 날 결의안은 지금도 매년 주 의회와 LA시, LA카운티 의회장에서 낭독되고 있다.     남가주에 한인 이민선조들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가 3곳이나 탄생할 수 있던 것도 그의 공헌이다. 이는 2020년 본지의 특별 시리즈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을 통해 비친 한인사회 이야기를 남긴 그가 유일하게 자랑했던 프로젝트다.   민 변호사는 당시 LA통합교육구(LAUSD)가 학교 신축 붐을 타고 옥스퍼드와 2가에 신축된 초등학교 이름을 ‘찰스 H. 김 초등학교(Charles H. Kim Elementary School)’로 명명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한 데 이어, 2009년에는 윌셔와 샤토가에 세워진 중학교 이름을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붙인 ‘김영옥 중학교(Young Oak Kim Academy)’로 명명하는 데 성공했다, 또 2013년에는 버몬트와 버질 애비뉴에 세운 의료 매그닛 초등학교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의사인 새미 리 박사의 이름을 붙인 ‘닥터 새미리 매그닛(Dr. Sammy Lee Magnet)’으로 만들었다.   한국인의 이름을 딴 초·중·고등학교를 미국에 세우는 건 명실공히 100년 앞을 내다본 교육 프로젝트다. 한인 이름을 명명한 학교가 줄줄이 탄생하자 타 아시안 커뮤니티도 한인 커뮤니티를 부러워했다.   2012년 4개 선거구로 쪼개진 LA한인타운을 단일화하는 캠페인이 진행될 때도 그가 있었다. 당시 암으로 안구를 적출한 지 1년도 채 안 된 시기였지만 민 변호사는 검은 안대를 착용하고 LA시 공청회에 참가해 단일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발언을 남겼다.   약 50년간 한인 커뮤니티의 중심에 있었고 여러 방면에서 활동해 왔지만 스스로 “다수보다는 소수에 속한 사람이었다”며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던 민 변호사는 2011년 안구 암으로 한쪽 눈을 적출한 후 다른 부위에도 암이 재발해 수차례 걸쳐 큰 수술과 방사선 치료 등을 받으면서도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 활동을 마다치 않았다.     그의 마지막 봉사활동은 지난달 6일 한인변호사협회(KABA)와 LA센트럴라이온스클럽에서 ‘법의 날’을 맞아 한인타운에서 진행하는 무료 법률상담 세미나를 알리는 홍보 활동이었다. 그는 두 달 전쯤 다리에 발생한 염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홍보 요청에 아픈 다리를 끌고 참여했을 만큼 한인 커뮤니티를 사랑했다.     유족 측은 장례 일정이 나오는 대로 추후공지할 예정이다.   ▶연락:(213)447-5475 캐롤라인 심, (626)274-8311 캐롤 민     장연화 기자민병수 변호사 민병수 변호사 선거구 필요성 한인 커뮤니티

2023-06-01

한인 모두의 변호인 민병수 변호사 타계

‘남가주 한인사회의 어른’ 민병수 변호사가 1일 오전 8시 별세했다. 향년 90세.   민 변호사는 최근 폐렴이 악화해 치료를 받아왔다.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아버지인 고 민희식 초대 LA총영사를 따라 가족과 함께 LA에 왔다. 1975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한인으로는 세 번째, 남가주에서는 두 번째 변호사로 합격한 후 48년간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한인 커뮤니티의 대들보이자 맏형 역할을 마다하지 않던 그는 1983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를 설립했으며, 현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의 전신인 한인청소년센터(KYC) 이사(1975~83년)로 있으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LA카운티 산하 법률위원회 첫 한인 커미셔너(1983~87년)이기도 했으며, LA폭동 이후에는 한미법률재단(KALAF) 회장을 맡아 폭동 피해 업주들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또한 매년 5월 1일 법의 날을 기해 한인들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을 38년동안 진행해왔다.   2004년 미주 한인의 날 제정과 한인타운 내 찰스 김 초등학교(2006년), 김영옥중학교(2009년), 새미리초등학교(2013년) 이름 명명에 앞장섰다.   또 세계한인교육자총연합회(IKEN) 초대 회장( 2010년), 애국동지회 고문(2013년)을 역임하며 한인 사회에 공헌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2001년), 재미동포 첫 대한민국 법률대상(2009년), 세계한인검사협회 주최 평생공로상(2018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주최 개척자상(2018년) 등을 수상했다. 관계기사 3면   유족으로는 부인 캐롤 민씨와 장남 크리스 민, 차남 티모시 민씨가 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변호인 민병수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주최 민병수 변호사 변호인 민병수

2023-06-01

민병수 변호사 구순 축하연

'남가주 한인사회의 어른' 민병수 변호사의 구순 생신 축하연이 지난 5일 용수산에서 친지와 커뮤니티 관계자 등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민 변호사가 교사 시절 가르친 제자들이 참가해 의미를 더했다. 또 민 변호사가 미주 한인의 날 제정과 한인 학교 이름 명명, LA한인타운 선거구 단일화 활동 등을 함께 한 타운 관계자들과 세계한인교육자협회(IKEN) 관계자들 외에 마이크 퐁 가주하원의원, 하워드 함 판사 등이 참석했다.   민 변호사가 5학년 때 담임이었다고 밝힌 윌리엄 시아스(54) 변호사는 "민 변호사님은 학생 한명 한명에게 세심하게 신경 써주던 선생님"이라고 기억을 들려줬다.   시아스 변호사는 이어 "오랜만에 찾아가 법대 진학 추천서를 부탁했을 때에도 흔쾌히 써주신 걸 잊지 못한다.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계셔서 감사하다"며 "선생님의 길을 따라가는 법조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인사했다.   이날 행사는 민 변호사와 함께 활동한 1.5세 후배들이 준비하고 박병철 에베레스트 트레이드사 회장이 후원했다. 박 회장은 이날 민 변호사 자서전 발간을 위한 기금모금을 주도해 약 6500여 달러를 모금했다.   박 회장은 "민병수 변호사는 한인 커뮤니티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분의 업적을 알리는 자서전이 나와 2세들에게 남겨지길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민 변호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왔는데 많은 분이 기억해 줘 기쁘고 감사하다. 남은 시간도 2~3세들과 커뮤니티를 위해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인사를 전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민병수 변호사 민병수 변호사 변호사 자서전 어른 민병수

2023-03-06

민병수 변호사 '89세 생일'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남가주 한인사회의 어른' 민병수 변호사의 89세 생신 축하 이벤트가 지난 12일 커뮤니티 관계자들과 가족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행사는 민 변호사와 함께 한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던 1.5세 한인들이 구순을 앞두고 마련했다. 행사 장소를 위해 에베레스트 트레이딩사의 박병철 회장이 자택을 오픈했고 민 변호사와 함께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 미주 한인의 날 제정 한인 학교 이름 명명 LA한인타운 선거구단일화 활동 등을 함께 한 타운 관계자들과 앤 박 판사 하워드 함 판사 등 법조인들과 미셸 박 연방하원의원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박 회장은 "민병수 변호사는 커뮤니티의 어른이다. 팬데믹을 건강하게 잘  이겨내주셔서 감사하다. 내년에도 또 후년에도 계속 이 자리에서 만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셸 박 의원은 "그분이 보여주신 커뮤니티 활동과 남겨주신 발자취는 1.5세 2세들에게 큰 힘이 됐다"며 "저도 그분의 발자취를 열심히 따라가겠다.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고 인사를 전했다.   민 변호사는 "젊은 친구들이 이런 자리를 준비해줘 민망할 뿐이다. 한인 커뮤니티 활동은 남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커뮤니티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힘이 남아있는 한 계속 도울 것"이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장연화 기자민병수 변호사 민병수 변호사 어른 민병수 한인 커뮤니티

2022-03-13

"한쪽 눈을 잃어 버렸지만 새로운 세상 얻었습니다"

이달 초 안구암 수술 받고도…벌써 현업 복귀 후배에 귀감 적잖은 두려움 있었지만…다른 한 눈 있어감사 할 뿐 40년 간 변호사로 활동하며 한인들에게 형사소송 관련 무료법률 상담을 하는 등 '한인사회의 맏형'으로 불려온 민병수 변호사(78)가 최근 안구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지난 3월 말 안구암 진단을 받은 민 변호사는 이달 초 왼쪽 안구 적출 수술을 받았다. 수술 부위가 아무는 7월부터는 8주 과정의 방사선 치료를 시작해야 되지만 그는 벌써 법원과 사무실을 출퇴근하는 변호사 생활로 복귀하며 흔들림 없는 본연의 모습을 보여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지난 14일 병원에서 퇴원한 사흘 후에 오렌지카운티 지역 법원에 계류 중인 케이스를 진행하기 위해 법원에 출두했다. 또 지난 21일에는 법정에서 판사가 눈에 붙인 반창고의 용도를 묻자 '애꾸눈이 됐다'고 웃으며 농담할 만큼 현재 상황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민 변호사에게 암 증세가 발견된 건 지난 해 말. 왼쪽 눈 아래가 불그스레 변하며 볼록해져 내과를 찾아갔던 그는 처음엔 그저 '종양같다'는 진단에 처방받은 항생제를 꾸준히 복용했다. 하지만 한 달이 넘도록 증세가 사라지지 않자 안과를 찾았고 조직검사를 통해 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처음엔 한쪽 눈을 잃는다는 것에 적잖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막상 한 눈으로 세상을 보니 그렇게 나쁘지도 않다"며 "비록 눈 하나는 잃었지만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얻은 것 같다"고 담담해 했다. 그는 특히 "수술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책을 읽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법원에서 변호사 일을 할 수 있어 지금의 내 삶이 기쁘다"고 말했다.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받아 긴장하고 있습니다. 남은 한쪽의 눈과 함께 남은 여생 즐겁게 또 열심히 살겠습니다." ☞민병수 변호사는 초대 교통부 장관이며 LA 1대 총영사였던 민희식(1895-1980) 선생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3 때인 1948년 미국에 도착한 그는 라번 대학을 졸업해 교사로 일하면서 글렌데일 법학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한 뒤 1975년 변호사가 됐다. 한미변호사협회(KABA)를 창설하고 회장을 역임한 그는 지미 카터 대통령 때 민주당 대통령 자문위원을 지냈다. LA미주한인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2003년 LA시와 카운티, 캘리포니아주와 연방 정부가 1월 13일을 '미주한인의 날'로 제정, 선포하는 데 앞장섰다. 또 2006년 '찰스 H. 김 초등학교', 2009년 '김영옥 중학교'명명 운동을 주도했다. 장연화 기자 yhchang@koreadaily.com

2011-06-22

[안구암 수술 민병수 변호사] "변호사직 은퇴? 계획없어요 저소득층 위해 일할 겁니다"

민병수 변호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22일은 안구 적출 수술을 받고 퇴원한 지 꼭 일주일 뒤였다. 윌셔가의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민 변호사는 한 손에 낡고 무거운 서류가방을, 다른 한 손엔 두툼한 배심원 관련 법률 책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케이스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주부터 운전도 시작했다"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 밝아,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거즈가 없었다면 수술한 환자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 안구암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어땠나요. "보통 그럴 때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냐'며 화가 난다는데 전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면 안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17살 때 고등학교 졸업반에 진학했다고 좋아하던 친구들이 6.25 전쟁으로 목숨을 많이 잃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생명이 많이 연장됐다고 해도 그들에 비하면 난 오래 산 거지요. 이 나이에 생명이 아깝다고 욕심을 부리는 건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가족들도 충격이 컸을 텐데요. "사실 가족들에게 가장 죄책감이 컸죠. 아내에게 말할 때 너무 미안했습니다. 아내도 17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완쾌됐지만 암을 경험한 사람에게 내가 암에 걸렸다는 걸 알려주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또 수술 후 만약 깨어나지 못하면 뒷처리를 해야 할텐데 준비없이 떠나는 것 같아서 미안했죠. 다행히 깨어났고 이렇게 활동할 수 있게 돼 기쁘고 감사하죠." -안구를 적출하는 수술이라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두려웠던 건 한쪽 눈이 없어도 지금처럼 생각하고 책을 읽고 말할 수 있는 가 였습니다. 의사한테 찾아가 물었죠. 근데 대답이 일상 생활을 그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결심이 쉬웠습니다. 아마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게 됐다면 엄청 좌절했을 겁니다. 수술 후 처음에는 걸을 때 중심잡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운전도 이번 주부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운행을 위해 앞차와의 거리나 속도에 신경쓰고 있습니다. (민 변호사는 수술 전 한 달동안 한쪽 눈을 감고 운전하는 법을 연습했다고 했다.)" -수술 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처음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온 몸이 너무 아파서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순간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우울했던 생각이 모두 걷혔습니다. 사실 사람사는 건 도전입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는 지가 중요하죠. 지금은 한 눈을 갖고도 이렇게 일상생활을 그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변호사직에서 은퇴는 안하실건가요. "저는 은퇴할 계획이 없는데요. 정신이 맑을 때까지는 일하고 싶습니다. 형사법 변호사의 고객은 저소득층이 많습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이들이 도움을 찾습니다. 생명이 있을 때 최대한 제 능력을 활용해야 하지 않겠어요? 또 아직 법정에서는 저를 70대로 보는 이들이 없거든요. 하하하." -앞으로 계획을 들려주세요. "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 지는 모르지만 김영옥 대령을 한인 2세들과 미국 사회에 알리는 데 일할 겁니다. 또 지금 맡고 있는 세계한인교육자총연합회(IKEN) 일도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장연화 기자

201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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